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난의 행군 (문단 편집) == [[선군정치]] 등장 == 고난의 행군 와중에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시도한다. 공식선포는 1996년이지만 김일성이 죽자마자 사실상의 계엄령이나 다름없는 무자비한 총질을 시작했다. 배급이 끊어지니 로동당일군이나 보위부 지도원들조차도 처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뇌물로 범죄를 무마하고 창고의 국가재산을 팔아먹기에 이른다. 간부들이 먹거리와 돈 몇 푼에 타락하고 통제가 유명무실해지니 주민들은 공장이나 사업소 농장에 출근하지 않고 먹거리찾아 나물을 캐고 파철(고철)을 줍고 공장 설비를 뜯어다가 헐값에 밀수해서 팔아먹는 형편이고, 협동농장은 밤마다 약탈당했다. 이런 분위기에 평양의 고위급 당간부들조차 술자리에서 체제가 이런 식이면 한 두 해면 무너진다고 여길 정도로 포기 상태였고 김정일은 자기의 지시가 지방은커녕 중앙에도 먹히지 않자 로동당일군과 [[국가보위성|국가보위부]]까지 불신[* 국가보위성은 당시 김정일의 동창이던 제1부부장 [[김영룡(1942)|김영룡]]을 반당반혁명종파 분자로 [[숙청]]하며 조직자체가 초토화되었다.]했다. 그러자 김정일은 "내는 여태까지 조선로동당에 신세진 일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다!"고 남탓을 시전하며[* 그러나 김정일은 후계자로 옹립되기 이전인 1969년 부터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및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고 로동당내 최요직인 조직지도부 부장직을 1972년부터 지냈고 집권 이후 공석으로 자신이 국가보위부장직과 함께 겸임했다.] 사회 전반을 '총대로 다스릴것'을 명령했다. 지금까지 협동농장을 털다 걸리면 1~2년의 로동단련형에 심하면 도검찰소와 재판소를 거쳐 징역에 해당하는 로동교화형을 받았으나[* 단련형과 교화형의 차이는 형기와 공민권 박탈여부로 단련형은 공민권이 박탈되지 않으나, 교화형은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추방되며 연좌되어 자식이 군인이면 강제 제대되거나 간부직에서 추방당한다.] 군[[보위국]]을 동원하여 도둑질은 현장 사살하고 도주범 체포 시에는 공개 총살을 시켰다. 그럼에도 도적질은 줄어들지 않았다. 인민보안성(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을 시켜 [[심화조 사건]]을 공작함과 동시에 지방에는 보위사령부(보위국)를 동원하여 지방일군들의 군기를 잡아 본보기로 간부들을 처형했다. 김정일은 “간부들 속에서 일상화된 부패타락과 패배주의를 뿌리뽑아야 한다”며 보위사령부에 “총소리를 내야 한다”며 이런 현상을 더욱 부추겼다. 공개처형 방식도 기존의 총살 방식을 변경해 김정일의 지시에 "머리가 썩은 자들은 그 대갈통부터 날려버려야 한다"기존에 세명이 세발씩 머리 가슴 배에 한발씩 쏘던걸 머리에만 9발을 명중시키는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했다. 이는 주민들의 반항심을 억누르고 "나라의 경제가 파탄나고 인민생활이 어려워진 것이 김정일의 정책을 왜곡 집행한 일부 간부들 때문이라고" 보여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심화조 사건이 채문덕을 토사구팽하며 마무리되었듯이 군 보위사령부(보위국)의 총질도 끝이 나게 되었다. 곳곳에서 어린아이들이 보위사령부식 공개 총살을 흉내내며 놀이를 한다는 보고가 평양까지 들어와 인심이 흉흉해졌고, 량강도에서 굶어서 기력없는 주민들을 집에서 강제로 끌고나와 도망가지 못하게 뒤에서 군병력이 지키며 공개총살을 강제 참관시켰는데 한참 지난 어느날 김정일이 "감히 인민의 등에 총구를 겨누다니!!"라고 펄펄 뛰면서 보위국을 문책하기 시작했다. 결국 "총 소리가 너무 크다"라는 김정일의 지시로 현대사에 유례 없는 선군정치라는 망나니 칼춤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김정일은 사회안전성의 채문덕과 졸개들을 죄다 쳐죽이고 사회안전성의 '사'자도 듣기 싫다며 이제 인민을 위해 일하라고 인민보안성으로 명칭을 변경하라고 지시했고, 보위사령부는 보위국으로 조직이 강등되며 간부들도 숙청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